상실감
지금은 6시 51분이다. 요즘 자꾸 밤을 새고 3-4시쯤 자는 버릇이 들어서 아예 오늘 밤을 새고 일찍 잠자리에 들 생각이다.
나는 커피를 마시고 메리대구공방전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다. 참 내가 자취를 하고 싶다고, 노트북을 가지고 싶다고 부모님한테 떼를 썼었던 것이 부끄러워지는 내용이다.
엄마와는 싸워서 냉전중이다.
운 좋게 이름 있는 대학교에 합격한 상태이다. 거의 백프로 운 때문인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만 사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운 좋게 합격했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지는 않다. 거의 운으로 합격한걸 알지만, 어쨌든 그 문제를 풀려면 어느 정도의 실력은 있어야 하는 거니까,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이정도면 스스로의 실력과 노력에 비해 분이차고도 남는 결과인건 알지만 그래도 주변사람들이 더 좋은 대학을 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쉬운 기분이 드는걸 보니 나는 참 주제넘고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엄마가 전에 내가 전문대를 갈지 취직을 바로해야할지 모르는 상태였을 때 약속을 했었다. 내가 이름 있는 대학을 가면 자취를 시켜준다고 했었다. 내가 한참 아빠와 내방이 없는 것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은 후였나 보다. 그리고는 나한테 늦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도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정말 믿었다. 엄마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래서 나는 미안했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늦었고, 나는 숭실대면 잘 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정말 자취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이후로 엄마에게 몇 번이고 확인을 했던 것 같다. 엄마, 나 정말 이름 있는 대학교에 가면 자취시켜줄거죠? 엄마는 이건 내가 하는 약속이라고, 자기 돈으로라도 시켜주겠다고 했다.
글쎄, 그리고 엄마는 내가 대학교에 합격하고 말을 바꾸었다. 처음엔 대화를 피하더니 정리를 3개월 동안 잘하면 자취시켜준다고 했다. 그러더니 3개월후에도 봐야 알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억울하고 분해서 울었다.
자취를 정말정말하고 싶었다. 아빠한테서 벗어나고 싶었고, 내방을 가지고 싶었다. 그게 무너지는 기분이 들어서 엉엉 울었다.
며칠 있다가 내가 얘기를 꺼냈다. 어쩔 거냐고. 엄마는 사실대로 말했다. 나는 그때 너를 자취시킬 마음이 요만큼도 없었노라고. 엄마아빠 둘 다 내가 이름 있는 대학교에 갈꺼라고 생각 못했다고.
사실 미리 혼자 생각할 때 예상했었던 대답이었다. 그럴만했다. 나는 공부하는모습도 잘 보여준 적이 없었고 성적도 좋지 않았으니까.
근데 생각보다 충격이 컸다. 그래서 또 울었다. 왜 혼자 예상까지 해놓고 아직도 완전히 풀리지 않는지 모르겠다. 나는 엄마를 너무 믿었던 것 같다. 말 그대로 나는 백프로 믿었다. 그 당시 나는 그게 거짓말일 것 이라고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지나고 보니, 당연했다. 공부하는모습도 못보고 성적도 좋게 않았는데 무슨 근거로 엄마만은 나를 믿어줄 것 이라고 생각했는지. 나는 참 바보다.
그 자리에서 엄마 앞에서 그 말을 듣고 엉엉 울었다. 자취는 꿈도 꾸지 말라는 것도 서러웠고 엄마 말을 그대로 100%믿은 나도 서러웠다. 엄마가 계속 나보고 너는 약속을 어긴 적이 없냐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래도 엄마, 내가하는 약속이 엄마한테 가지는 의미와 엄마가 나한테 내가 한참 힘들 때 했던 그 약속의 무게는 틀리잖아. 그치? 그 말을 속으로 꾸욱 삼키며 나는 울었다.
엄마는 미안하다고 했고, 그이후로 가끔 내 눈치를 봤다. 그리고 얼마 후에 엄마와 싸우고 나는 결국 풀지 못했다. 나는 엄마가 알아줄거라고, 내가 얼마나 서운한지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에게는 이게 내가 자취를 하고싶다는 조름으로만 느껴지나 보다. 섭섭했다.
지금도 무슨 감수성이 넘쳐선지 그때 생각이 나서 눈물이 줄줄 흐른다.
배신감이 든다. 엄마한테. 나는 진짜 믿었는데.
왜 이렇게 안 풀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지금 좀 지나서 생각해보니 알 것도 같다.
최초다. 최초로 엄마의 약속이 깨졌다. 내가 의심 없이 믿을만한 존재가 이제는 없다. 너무 굳게 믿었나보다.
내가 엄마한테 응어리가 있어서 엄마를 화나게 하려고 홧김에 말했던 거였지만 아마, 정말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세상에서 1%의 의심도 없이 믿었던 사람이 거짓말을 했고,
더 이상 나에게는 없으니까. 완벽하게 믿을 사람이. 아마 지금까지 내가 겪은 가장 큰 배신이 될 것이다.
나는 안다.
이 일이 배신이라고 부르기에는 나쁘거나 부정적인 것이 너무 적음을. 엄마도 결국에는 나 잘되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래도, 나는 엄마가 내가 어쩌면 좋은 결과를 낼 거라는 한줌의 희망도 없이 나에게 희망의 단어들을 뱉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크나큰 충격이고, 배신이다.
앞으로 내가 살면서, 사회에 나가면서 이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불순하고 부정적이고 고의적인 거짓말과 배신을 겪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나는 이 일을 떨쳐내지 못하겠다. 나는 아직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