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가만히 당신의 감정을 느껴보세요. 혼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가만히 자신의 감정을 느껴보면...."
그가 하고자 한 질문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당신은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당신은 무얼 두려워하고 무엇에 분노합니까? 다른 어떤 사람도 곁에 없을 때 당신은 누구입니까? 물론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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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우리가 성숙한 방식으로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힘겨운 인생 경험을 박탈한다. 간편한 변신을 위해 술을 마신다면, 술을 마시고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면, 그리고 이런 일을 날마다 반복한다면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는 진흙탕처럼 혼탁해지고 만다. 우리는 방향 감각도 잃고 말 딛고 선 땅에 대한 안정감도 잃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기본적 사항들 - 두려워하는 것, 좋아하는 느낌과 싫어하는 느낌,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 도 알 수 없게 된다.
책의 중간에 나오는 작가가 했던 알콜중독 테스트를 해보니 나는 알콜중독 중기가 나왔다. 그래서 그런가, 책에서 나오는 알콜중독의 경험에서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인격의 성장을 위해 겪어야 하는 힘겹고 값진 인생경험을 술을 마심으로써 박탈당한다는 내용이 정말 공감갔다. 20-21살의 2년동안은 대학교에 입학해 술을 마신 날이 마시지 않은 날보다 많을 것이다. 첫 남자친구도 술에 취했을 때 생겼고, 친구들도 술에 취했을 때 친해졌다. 모든 중요한 인간관계의 관문은 술에 취한태로 넘었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아직 23살때에 멈춰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글쓴이는 '욕구들'에서처럼 알콜중독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독에 대해서도 다루는데, 알콜중독과 거식증, 폭식증, 쇼핑중독 등 모든 중독이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그러나 중요한 인생의 고민을 회피하고 불안감을 망각하기 위해서 걸리는 것이라는 부분에서는 궤를 같이한다. 그리고 또한 사회가 얼마나 이런 중독에 걸리도록 온 힘을 다해 도와주는지도 알게 된다.
머리가 자라기 시작한 중학생 시절부터 내 인생은 중독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공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생의 의미와 목표, 방향성 같은 중요하고 어렵고 불안한 것에 대해 생각을 하다가 눈을 돌릴 대상을 찾아 인생을 바쳐 중독되는 것이 대략적인 내 인생의 루틴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이 아마 인생의 목표와 방향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기간인것 같은데, 부디 다음 루틴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면 한다.
'욕구들'을 읽다가 전자도서관에서 캐롤라인 냅의 책을 찾아서 읽어본건데, '욕구들'의 프리뷰버전쯤 되는 것 같다. 덜 무겁고 알콜 중독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담고 있는 내용의 방향성은 같다. 그리고 정말 슬프게도 공감가는 내용이 많다. 잠깐 읽어봐야지 하다가 반정도 읽었다. 나 역시 술을 좋아하고, 과음으로 인해 여러번 블랙아웃을 경험해봤으며 중복중독의 연속인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에 책 속의 문장들이 내 이야기 인것 같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뭉뚱그려서 날려보냈던 내 감정과 현상에 무게를 달아 꽉꽉 눌러서 표현해준 글을 읽는 기분이었다. 내가 느꼈던 감정이 이런거였구나, 그때 겪었던 일이 이런 일이었구나를 읽으면서 깨달았다.
에세이를 읽은지 정말 오래됐는데, '드링킹'과 '욕구들'을 다 읽으면 '명랑한 은둔자'도 시작할 것 같다.